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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도서

[리뷰]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악질 매국노 44인 이야기

by nomadmeo 202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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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노마드미오가 소개할 책은  30여 년간 친일문제를 취재·연구해 온 정운현 작가가 출간한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입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서울신문·오마이뉴스 등을 거친 정 작가는 1980년대 후반 한 주간지에서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 선생의 삶을 다룬 기사를 읽은 것을 계기로 친일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친일파 1호’ 김인승, 친일을 직업적으로 한 조병상, 해인사 주지로 사명대사 비석 파괴에 
앞장선 변설호, 지식인의 책무를 저버린 춘원과 육당, 지금까지도 근대여성의 상징으로 군림하고 있는
 김활란과 모윤숙, 그리고 고문경찰의 상징 노덕술 등 한국사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친일파’ 44인의
행적을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Q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를 집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하다.
A 일제하의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은 거의 다 죽었다. 현실적으로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을 단죄하는 방법이 있다면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길이다. 기록으로 남길 경우 그들은 천추만대에 
민족사의 죄인으로 각인될 것이다. 다만 그 기록은 정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20세기 초 매국에 가담했던 친일파들은 이미 100년 전의 인물이다. 남아 있는 자료들도 많지
않고 그나마 사라진 것도 많다. 증언을 듣기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묵은 신문자료를 뒤지거나
현지취재도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일본에서 귀한 자료를 상당수 입수할 수 있었으나 중국은 여전히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 상태다. 갈수록 친일파에 대한 취재와 자료 수집은 어려울 것이다. 

‘악질 매국노 44인의 이야기’라는 어깨 제목이 인상적이다. 차례에 올라온 이름들은 모두가 알 만한
현대사 속 유명인들이 등장한다.이 책에 실린 44명은 각 분야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민족지사로 알려졌던 분들 가운데는 일제 때 친일을 한 분들이 적지 않다.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을 들 수 있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이들의  친일행적을 알려주는 연구서나
자료가 극히 미비했다. 취재 과정에서 일제 당시의 신문이나 자료 등을 통해 이들의 친일행위의 실체를
발견하고는 극도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동안 우리가 배운 역사는 모두 엉터리였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사례는 비단 육당과 춘원뿐만이 아니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린·정춘수 같은 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친일행적을 발견할 때는 마치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이
묘한 희열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조선인으로서 신직을 지낸 이산연이 그런 경우였다. 이산연은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내가 발굴한 인물이다. 

“저의 마지막 ‘친일파’ 책입니다”
광복절에 맞춰 출간한 ‘친일파의 한국현대사’(부제 :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악질 
매국노 44인 이야기)는 30여년간 스무권이 넘는 친일역사 관련 서적을 펴낸 언론인 정운현의 마지막
 친일파 책이다. 그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이제 제가 단행본으로 펴낼만한 내용은 없어요”라며 “
다음 세대가 이를 바탕으로 계속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새로운 문건, 이를테면 중국 당안관(국가기록보존소) 문서가 공개돼 만주지역 친일파들의 
행적이 새로 나오지 않는 한 친일파 개인에 대한 인물탐구가 친일파 연구에 주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 71년이 지나면서 친일파도 잊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발품 팔아 한 장 한 장 어렵게 구한 친일파들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사다.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듯, 무덤 속의 시체가 관 뚜껑을 
열고 무덤에서 걸어 나온 듯,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져 세상을 뒤흔들어놓는다. 친일 문제는 여전히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물이요, 살아서 파닥거리는 갓 잡아 올린 생선이다.”(책 서문)​ ​

1. 아버지의 범죄, 아들의 속죄 - 을미사변 가담한 우범선과  아들 우장춘 
1937년으로 추정되는 시점에 일본 교토에 모인 조선인 과학자들. 왼쪽부터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다.
육종학자인 우장춘은 1950년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 토양에 맞는 배추와 무, 고추, 벼 등의 종자를
개발했다. 양자화학을 전공한 이태규는 미국 유타대에서 아이링 교수와 함께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해
노벨상 후보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을 개발한 리승기는 서울대 공대 학장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에 합류했다.  - 위즈덤하우스 제공

2. 독립운 동가 3명을 고문치사시킨 잔인한 ‘고문왕’ - 최악의 경찰  노덕술 
3. ‘흑치마’ 라 불린 ‘조선의 마타 하리’ - 여자 밀정  배정자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부터, 반감을 품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제 외무성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파견 근무를 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블라디미르 레닌의 러시아 혁명을막기 위해 출병을
 했을 때 일본 영사관 직원으로 만주, 시베리아를 오가며 군사 활동을 하였고 그 후에는
간도, 중국 상하이 등에서 조선의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반일 마적 체포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이들을 검거하는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
 1922년 조선으로 돌아와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촉탁 근무를 하였고 이후에도총독부
 경무국장의 훈령에따라 만주와 중국에서 조선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다
 1927년 은퇴하였고 은퇴 후에도 총독부의 금전 지원을 받아왔다.


4. 강화도조약 체결을 도운 조선인 - ‘친일파 1호’ 김인승 

5. 일본의 ‘스코틀랜드화’가 조선의 살 길 - 독립협회장 윤치호 
6. 북으로 간 ‘조선의 꽃’ - 월북 무용가 최승희 
7. 반민특위 검거 제1호 - 전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8. ‘여성 박사 제1호’의 카멜레온 같은 삶 - 전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9. 귀족(貴族) 또는 귀족(鬼族) - ‘을사오적’ 이근택 

 1903년 10월부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가 추진하는 한일밀약에 동조했으며, 11월 특명전권대사를
겸직하면서 일본과 밀약을 맺는데앞장섰다. 1904년 2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 11월 호위대총관을
겸했다. 1905년 3월 주전원경, 4월 시종무관장, 6월 농상공부대신, 7월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8월에는 일본정부가 주는 욱일대수장을 받았으며, 9월에는 군부대신으로 전임하면서 을사조약체결을
주도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을받았다.
1906년 2월 기산도, 이근철의 공격을 받았고, 11월 중추원 의장, 12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7년 3월 배종 무관장을 겸하였고, 5월 중추원 고문을 지냈으며, 9월 군대해산으로 육군부장에서 예편했다.
 1908년 5월 대한흥학회 고문, 8월 기호흥학회 주무원 및 12월 특별찬성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적십자사에서 주는 유공장을 받았다다
1910년 10월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가 자작 작위를 주었다. 같은 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0. 조선금융계의 황제? 식민 착취의 황제! - 전 한성은행장 한상룡
11. 상해 임시정부의 ‘위장취업자’ - 전 상해 임정 군무부 차장 김희선 ​
12. 막노동판 주먹패, 일본 국회의원 되다 - 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13. 죽여야 할 첫 번째 인물 - 직업밀정, 고등계 형사 선우순 · 선우갑 형제

친일 단체 대동동지회 회장을 지낸 선우순의 친동생이다. 평양 출신으로 일본 경찰 고등계 형사로 일했다.
1919년 2·8 독립 선언 당시에 도쿄에 파견되어 유학생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송계백 및 최팔용 등
 이 사건의 주동자들 밀고하여 체포에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일본 제국의 큰 신임을 받으며 미국 등 외국에
 기자로 파견되어 재외 독립 운동을 감시하고 국제 여론을 조선 독립에 부정적인 쪽으로 유도하는 일을 맡아
 했다.김구의 《백범일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서 밀정 노릇을 하던 선우갑을 생포했다가
 장공속죄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풀어주었더니 곧 달아나 버렸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14. 과거를 묻지 마세요? -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다가 밀정이 된 이갑성
15. 조선의 땅투기꾼 - 제1호 공주 갑부 김갑순 
16. 지조냐, 학식이냐 - 독립선언서 기초한 최남선 

1943년 11월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에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선배 격려단’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달 일본의 조선인
 가정 방문과 간담회,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1월 14일과 20일에는 일본 메이지대학강당에서 열린 반도출신
출정학도궐기대회에서 학병 지원 관련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17.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대를 이어 친일한 민병석 · 민복기 부자 
18. ‘황국신민의 서사’로 오른 출세가도 - 해방 전 경북도지사 김대우 
19. 항일군 토벌에 앞장선 권력 - 엘리트 만주 특무책임자 김창영

 1912년 4월 1일부터 1913년 10월 30일까지 강계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5년 5월 1일부터 11월 10일까지 평안북도 강계군 재무과에서 근무했고 나중에 일본으로 유학했다.
 1916년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1917년 귀국한 뒤 1921년 11월까지 평안북도 강계군 
공북면장에 임명되면서 관직을 시작했고 1921년부터는 강원도 경찰로 옮겨 근무하면서 경시로 승진
금산군 군수도 거쳤다. 
평안북도 강계군 공북면장 재직 시절 평안북도지사로부터 표창을 2차례 받았으며 1921년 3월 5일에는 
평안북도지사로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군수 직책을 맡고 있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직후 만주국의 치안부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만주국에 파견되었다. 무장 독립 운동
세력이 남아 있던 만주국에서는 치안부가 항일 군대의 귀순, 토벌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김창영은 이 곳에서 양정우 부대원 7백여 명을 귀순시키고, 임수산, 오성륜, 박득범, 김백산 등 수백여 명의
항일 세력을 체포 또는 사살하는 공적을 기록했다.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거치면서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 탄압 사실이 드러났고, 공민권정지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 생선을 미끼로 출세길 잡은 ‘애국옹’ - 영덕 갑부 문명기  
21. 독립군 때려잡던 관동군에 군량미를 제공하다 - 전 문교부 장관 이선근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1922년)후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와세다 대학교 서양사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재학 중 전진한, 이하윤 등과 함께 비밀결사 '한빛회'를 결성하였으며, 협동조합체, 신간회 동경지회에 
참가하였다.  1929년 대학 졸업 이후 귀국하여 첫 직장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하였다.조선일보 퇴직 후 잠시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7년 만주로 가서, 만몽산업주식회사 상무이사가 되어 관동군에 군량미를
공급하였으며,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을 지냈다.해방 이후 귀국하여 1946년 2월 한성일보 주필이 되었으며
 1947년 8월에는 대동청년단을 창단하여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자신은 그 부단장 겸 기획위원장이 되었다
9월 서울대학교 학생처장을 맡아 국대안 파동을 수습하였다. 1950년 2월 국방부 정훈국장이 되었으며, 
1954년 4월 21일부터 1956년 6월 7일까지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1956년 정,부통령 부정 선거에 적극 개입하여 민주당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1956년 6월 5일 국회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불명예 퇴진하였다.
1978년 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내면서 유신 체제를 적극 찬양하였다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다시 전두환의 집권을 찬양하였다

22. “나를 손가락질해다오” -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 ​
23. 끝내 일제에 굴복한 ‘직필’ - 2 · 8독립선언 주역 서춘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교토 제국대학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에 실행위원 11인이자 9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금고 9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3·1 운동에 참가한 김도태, 김지환은 그의 오산학교 선배 이며, 1918년 말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에게 
도쿄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전해 이승훈이 3·1 운동을 기획하는 계기를 제공한 사람도 서춘이었다. 
그러나 출옥 후에는 2·8 독립선언 참가자들 중 이광수와 함께 대표적인 변절자가 되었다
귀국하여 1927년 《동아일보》, 1932년 《조선일보》에서 경제부 기자를 지내면서 경제 전문가로 활동
하다가, 중일 전쟁 이후로 일본 제국의 전시 경제 정책을 찬양하는 어용 평론을 썼으며 《조광》 등 
친일 잡지에 기고했다. 특히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주필을 맡으면서 방송선전협의회 강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으로 강연과 기고 활동을 통해 친일 활동을 벌였고, 
1940년 일본어로 발행되는 친일 잡지 《태양》을 창간하기도 했다. 1944년 5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24.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 
25. 일제 ‘문화정치’의 조력자 - 언론인 진학문 ​
26. ‘팔굉일우’ 외친 ‘불놀이’ 작가 - 시인 주요한 
27.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시인 김동환 
28. 사라진 선구자의 꿈 - 시인, 작사가 윤해영 
29.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에 바친 시 - 시인 김용제 
30.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스럽게 살리라 - 조선인 첫 신직 이산연 
31. ‘황도불교 건설’ 외친 불교계 거두 - 친일 승려 제1호 이종욱 

월정사 승려로 있을 때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고, 이종욱은 만세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탁의 무장 단체인
 27결사대에도 가입했다. 3·1 운동의 결과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설치된 임시의정원에서도 강원도 대표를 맡았다. 그러나 이종욱은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국내 불교계에서 활동을 했으며, 이때부터 광복 시점까지 일관된 친일 행적을 남겼다. 

그는 1923년에는 상하이에서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에 복귀해 있었고,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는 
월정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그해 불교계 대표격인 종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이종욱이 일제에 겉으로
드러나도록 협조한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부임 때 불교계를 대표하여 미나미 환영식에
참가한 무렵부터이다. 1937년 31개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을 설립하기로 했을 때 총본산건설
위원회 대표가 되었는데, 당시 이처럼 불교계의 수장으로 인정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중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기원법회나 시국강연회를 열어서 적극적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협력했다.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 국민
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빠짐없이 가담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친일 승려로 오래
활동했기에 광복 이틀 후에는 1941년부터 맡아온 종무총장 직에서 사퇴해야 했으며 승권 정지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종욱은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반탁 운동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 자리로 돌아왔다. 이종욱이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친일 승려로 유명한
권상로가 총장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32. 항일은 짧고 친일은 길다 -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최린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며 본격적인 친일행보를 개시하였다. 
1934년 8월 30일 내선일가에 입각한 정신, 생활개선운동 단체 시중회를 조직하고 이사에 선임
1936년 11월에는 시중회 대표로 조선인의 징병을 청원하였다. 
1938년 5월 시중회 대표로 지원병제도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8년 4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단장에 선임되어 조선인의 전쟁동원을 앞장서서 독려하였다. 

33. 두 아들을 전장에 내보낸 ‘직업적 친일분자’ - 종로경방단장 조병상 
 태평양 전쟁 중 장성한 아들 중 장남을 지원병으로, 차남을 학병으로 참전시킨 뒤,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학도특별지원병 제도 실시가 상류계급의 애국심을 재는 잣대가 
될 것이라며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베이징 등 북중국 지역의 일본군을 직접 위문하기도 했다.

34. 백범 울리는 남산 백범 동상 미술가 - 김인승 · 김경승 형제 
김인승은 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35. 역사와 민중에게 ‘무정’했던 대문호 - 작가 이광수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일본으로 유학 가는데, 친일단체 일진회에서 후원한다. 젊어서는
 독립운동에 뜻이 있었던 자였다. 상해에서 안창호 선생님을 만난다. 그런데 돌아온 이광수는
천도교 잡지 '개벽'에다 '민족개조론'을 발표한다"라고 밝혔다. 열등한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글이었다. 

36. 사명당 비석 네 동강 낸 친일 승려 - 해인사 주지 변설호 

​ 1935년 9월 유점사 경성포교소로 부임하면서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터지자 용산 주둔 조선군사령부에 가서 전사한 일본군의 위령제를 지내주는가 하면 
일본군 출정 부대를 전송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에는 경성포교소에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냈다. 또 신도들로부터 국방헌금 50원을 걷어 부대에 전달하기도 했다.이런 친일행각의 공로를 인정받아
 3월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해인사 주지로 선출되었다. 그는 정식 발령을 받기도 전에 해인사 본사와 말사의 
승려들을 협박해 막대한 국방헌금과 물품을 일본군에게 바쳤다. 해인사 주지로 온 변설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항일 승려를 밀고한 일이다. 해방 이듬해 일제 때의 반민족 행위로 승권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고 절에서 
쫒겨났다. 또 1949년에는 반민특위 경남지부에 체포돼 한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는 희한하게 대한불교
 총화종이라는 곳의 초대 종정을 지내다 1년만에 사망했다. 

37. 암흑기 민족에게 친일을 강요하다 -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동아일보 정주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
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

38. 친미에서 친러로, 친러에서 친일로 - 오로지 일신의 영달 추구한 이완용 
1858년(철종 9) 6월 7일 ~1926년 2월 11일
대한제국에서 외부대신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이며 을사5적 경술9적
 정미칠적 관여한 친일반민족행위자관직생활 초기에는 수구파였으나 1년간의 미국 체류 후 친미파로
, 러일전쟁 후에는 친일파로 변신했다. 
아관파천 이후 잠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초대부회장, 2대회장 활동한 적이 있다. 
을사늑약을 적극 추진한 공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다. 고종의 양위,
 한국군대 해산 등을 주도했다. 1910년에는 순종을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낸 공로로 백작 작위를 받았다

😢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
1881년 (고종 18) 8월 21일 ~1945년 3월 6일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된 친일파 이완용의 차남이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1918년 이왕직 의식과장 등을 지냈고, 1932년 이왕직 차관으로 승격되었다가 
장관까지 역임했다여담으로 1912년에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면서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1945년 3월 6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작위는 그의 차남인 이병주가 습작했지만 불과 5개월 만에 광복되어 작위를 잃었다.


😢  이완용 손자 이병길
1905년 1월 12일 ~1950년 12월 29일
1927년 2월 다이쇼 덴노 장례식과 1928년 9월 쇼와 덴노 즉위 대례식에 각각 후작 대표로 참석, 
이후 11월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7년 7월 한성은행의 대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31년, 1932년 정5위 후작 자격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촉탁을 지냈으며, 1932년 12월에 
종4위로 승서했고, 1934년 일본 궁내성 식부직 어용계를 지냈다.
 1935년 10월부터 1941년까지 조선신궁에서 열린 각종 행사에 조선귀족 총대로 참석해 참배를 올렸다.
1937년 8월 조선귀족들로 구성된 친일단체 동요회 발기인회에 참석해 동요회 발기인 겸 이사장에
 선출9월 이홍묵, 박부양, 김호규, 한상억 등과 함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방문하여 중일전쟁과 
관련된 국방헌금 1만원을 헌납했다
1943년 1월 조선저축은행의 감사역에 취임하면서, 동시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같은 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할아버지 이완용, 아버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수록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병길과 그의 조부 이완용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손자 이병주(1962년 일본 밀항, 일본정부가 귀화시키고 환대)
증손 이석형(1979년 이완용 부부 묘를 파내어 화장)
훗날 그의 아들 이윤형은 캐나다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1980년대 말 대한민국에 귀국해 친일파 후손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걸면서 자신의 증조부인 이완용의 땅을 돌려받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그는 1989년에서 1992년까지 17건의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한 바가 있다.
결국 1997년 재판부의 판결을 통해 시가 30억 땅을 되찾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부동산에 전부
팔아버린다음 다시 캐나다로 떠나버렸고, 2005년 다시 대한민국에 돌아와 2006년까지
지속적으로 토지 반환 소송을 걸기도 했다.


39. 고종 황제를 협박한 매국노 - ‘한일합방 청원서’ 낸 송병준 
1871년 무과에 급제해 벼슬에 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민씨정권은 청나라와 가까웠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옥균 등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피신했다. 같은해 송병준은 조선정부로부터 밀명을 받고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 암살
명령을받는다. 하지만 송병준은 김옥균을 살해하지 않고 오히려 김옥균에 설득당했고, 자신이 암살하러 온
사실까지털어놨다. 김옥균과 동지가 됐다. 하지만 김옥균이 암살당하자 조선에 반감을 품고 노다 헤이치로
창씨개명조선인임을 포기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그는 일본군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 육군소장의 군사통역을 맡으며 친일파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과 같은해 8월18일 유신회를 조직하고 이틀 뒤 일진회로 이름을 
바꿨다. 일진회는 이용구의 진보회와 통합하고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병합당할 때까지 일제를 돕는데
 헌신했다. 1904년 12월 송병준은 일본군 마쓰이시 대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을사늑약을 모의했다.
한국인이 나서 나라를 빼앗아 달라고 애걸한 것이다. 1907년 친일신문 ‘국민신보’의 2대 사장을 맡았고,
 이완용 내각에서 농공상부대신을 역임했다. 일제가 고종을 물러나라고 하자 송병준·이완용 등은앞장섰다.

송병준의 증손자  송돈호 역삼동 건설회사 운영하다  2005년 12월 여야가 합의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조상 땅 찾기 소송 중이던 2007년 
국유지인 부평 주한미군 기지 13만평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다. 
그는 이곳이 증조부 송병준의 땅인데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자기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속여 그 중
 약 5000㎡에 대해 건설업자 두 명과 아파트 부지로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2억20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검찰 수배를 받았다. 



40. 동학군 지도자는 어떻게 매국노가 되었나? -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진회 회장까지 맡으며 한일합방 청원운동을 펼쳤다. 이용구의 바람은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진 뒤
25만 일진회원을 이끌고 간도로 가 떵떵거리며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300만 엔이 필요
했는데 이에 대해 가쓰라 다로 일본 수상을 만나 “300만 엔이 아니라 3000만 엔이라도 책임지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하지만 주권을 뺏자 일본의 태도는 변했다. 일제는 일진회에 대해 강제해산명령을
내렸다. 일진회원들의 불만이터지자 이용구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일본 스마에 머물던 이용구는 결국 울화병에 걸렸고, 죽기 3달 전 친구인 다케다 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속내를 드러냈다. “어릴 때부터 평생 제가 추구한 것은 일신상의 사리가 아니라 국가의 대리와 인민 구제의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잘도 속임을 당하고 잘도 농락됐음을 깨닫게 됩니다.
2000만 인민을 일본의 최하등민으로 빠뜨린 죄도 소생에게 있습니다. 소생을 보고 매국노라 부르는 사람이
있어도, 어찌 입이 있어 변명을 하겠습니까” 쓸쓸한 최후였다. 



41. ‘전천후 친일’ - 여성 친일파 대명사 & 군부독재와도 함께한 모윤숙
친일은 군부독재와 이어진다. 상징적인 인물. 그는 인민을 학대하는데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사용했다.
 “가난헌 이 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오로지 끓는 피 한 목음을 축여보태옵니다”(삼천리 1941년 1월1일자)
 그는 강제동원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을 ‘정의의 용사’로 추켜세웠다. 

지원병제가 확대되자 그의 재능(?)도 폭발했다. “사실 나는 육군 지원제가 공포될 때보다 이번 해군 특별 
지원병이 공포될 때 더 감격이 됐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바다를 무척 좋아하는 데서 나온 감격일 것입니다.
”(춘추 1943년 6월호)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현대문화사,2009)
 

* 번외
책에는 나오지않으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親日反民族行爲705人名單) 2009년 11월 27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 위원장 성대경)가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5명에 관한 명단에 포함된 인물


🟧 몸은 한국인 마음은 친일파였던 박중양
1897년에 관비장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900년에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졸업,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 실습했다.
1903년에는 도쿄부기학교에서 은행 업무를 익힌 후 졸업
1910년부터 1915년까지  1939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35년판 『조선공로자명감에 의하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식민통치 25년간 최고의 공로자로  평가
 1938년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총독의 자문사항을 심의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중추원 고문, 1945년 8월까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 일제시대 최고의 갑부 민영휘
1852년 5월 15일 ~ 1935년 12월 30일
여흥 민씨가 주축이 된 친청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자 일제강점기 시기의 최고 갑부이다
관리생활 초창기부터 나라를 망치던 탐관오리 친일활동과 부정부패, 사업 등으로 긁어모은
 민영휘의 재산은 당대 가치로 6000만 원이었다고 한다.
 2023년 가치로 4800억~7800억 원으로 추정
손 민병도 : 제일은행장, 한국은행총재 지냄
증손 민웅기 : 남이섬 소유
증손 민인기 : (대치동) 휘문고교 이사장(현/ 교정에 민영휘 동상 세워져 있음)
현손 민경현 : (인사동) 풍문여고 이사장(현) 


을사오적 (5명): 
권중현 (權重顯) - 수작/습작, 중추원
박제순 (朴齊純) - 수작/습작, 종교
이근택 (李根澤) - 수작/습작, 중추원
이완용 (李完用) - 수작/습작, 중추원
이지용 (李址鎔) - 수작/습작, 중추원


정미칠적 (7명):  
고영희 (高永喜) - 수작/습작, 중추원
송병준 (宋秉畯) - 수작/습작, 중추원
이병무 (李秉武) - 수작/습작
이완용 (李完用) - 수작/습작, 중추원
이재곤 (李載崑) - 수작/습작, 중추원
임선준 (任善準) - 수작/습작, 중추원
조중응 (趙重應) - 수작/습작, 중추원



경술국적 (9명)
고영희 (高永喜) - 수작/습작, 중추원
민병석 (閔丙奭) - 수작/습작, 중추원
박제순 (朴齊純) - 수작/습작, 종교
윤덕영 (尹德榮) - 수작/습작, 중추원, 제국의회
이병무 (李秉武) - 수작/습작
이완용 (李完用) - 수작/습작, 중추원
이재면 (李載冕)
조민희 (趙民熙) - 수작/습작, 중추원
조중응 (趙重應) - 수작/습작, 중추원


🟧   백선엽 
윤봉길의사가 투척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한달귀 사망한 일본 침략전쟁영웅
시라카와 요시노리로창씨 개명을 하고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복무하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협력했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 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져 그는어떠한 해명도 않고 2000년 돌아가셨습니다 

🟧  김순흥 
가네모토 준쿄 1910년 12월 28일 ~ 1981년 10월 26일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자본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940년 9월 중앙연료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1943년 8월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국방헌금
 3,000원을 헌납했다. 1933년 ~ 1940년간 그는 연평균 1,700원 정도의 헌금을 냈다.
그의 연평균 소득은 11만원 정도였으며 군용기 가격은 대당 75,000원 정도였다1948년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이 지목한 숙청대상 친일 인사들 명단초안에 이름을 올랐고
1948년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 2009년 친일인명사전 경제부문에 선정되었다.​

🟧   이기용 
1889년 11월 1일 ~ 1961년 3월 4일
한일병탄 이후 1910년 10월 7일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다.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 무덤에 참배하고천장절 관병식에도 참석
1911년 8월에는 〈매일신보〉에 한일합병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게재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같은 해 재동공립보통학교 위원으로 활동
1914년에는 2번 씩이나 자신의 땅을 도로놓을 부지로 조선총독부에 기부했다
1915년 11월 3일에는 일본 다이쇼 덴노의 즉위식 참석 차 교토에 다녀왔다.
 1920년대에는 도박 등으로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빚을 져 파산신청
1936년에는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에 있는 금광과 은광의 공동광업권을 취득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한국 고대사 연구의 권위자. 일제하 식민사관 정립한 이병도
🟧  침략전쟁 찬양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 받은 윤치영
🟧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친일 논설을 펴고 전쟁협력 주장한 박희도 목사
🟧  연해주 최고의 밀정 엄인섭

1920년 간도 15만 원 사건'은 1920년 1월 북간도의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박웅세, 김준
등 철혈광복단 6명이 일제가 조선은행 회령지점 에서 북간도의 용정촌
지점으로 운송중이던 일본화폐 15만원을 탈취한 사건을 말한다.
6명의 독립운동가들이 15만원 탈취하고 가던길에 엄인섭을 만나는데, 엄인섭은 '무기
구입하는데 위험에서 총이 필요하다.'면서 거짓으로 말하고, 6명의 독립운동가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 영사관에 밀고하여 헌병대가 덮치게 꾸몄다.
철혈광복단이 훔친 15만원(150억)으로 무기를 사기 위해 엄인섭을 찾아갔다.
엄인섭은 최재형 선생님의 조카이자, 안중근 의사의 전우였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믿었다. 그런데 기토 가쓰미가 엄인섭을 밀정으로 삼았다. 결국 우리 독립군들은 150억
원을 거의 일본에게 뺏겼다. 500여 명의 독립군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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